흥해배씨 이야기
흥해배씨(興海裵氏) 백죽당공파 문중(栢竹堂公派 門中)
-낙남(落南) 후 600여 년의 이야기-
 

 
흥해배씨의 안동세거
 

[도목촌 전경]

흥해배씨의 안동 세거는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1351~1413)로부터 시작되었으니, 흥해배씨 백죽당 종가는 고려 말부터 현재까지 거의 630년, 23대째 종통(宗統)을 잇고 있다. 백죽당은 고려가 망하자 벼슬(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을 버리고 외가(외조부: 정평공靖平公 손홍량孫洪亮)와 처가(장인: 문정공文靖公 권희정權希正)가 있던 안동으로 내려와 서후 금계리의 용암(龍巖) 근처에 터를 잡고 옛 왕조인 고려조에 대한 지조를 지킨다는 뜻으로 집주변에 잣나무(측백나무)와 대나무를 심었다. 백죽당은 고려의 절의파 인물로 대표되는‘두문동72현(杜門洞72賢)’가운데 한 사람이다. 현재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는 의성김씨·안동장씨·원주변씨·안동권씨·진주하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지만, 백죽당은‘천년불패(千年不敗)’의 땅으로 회자되는 금계리를 개척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흥해배씨는 조선초기에 일족을 이루어 금계리에 살면서 오늘날과 같은 천년불패의 땅이 되도록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종가는 백죽당의 증손대에 풍기 미가암리(현재 영주시 안정면 신전리)로, 현손대에는 내성현 유록(현재 봉화군 봉화읍 석평리)으로 이거하여 살았다. 6대손 때인 1554년에 다시 금계리로 잠시 이거했다가 1558년에 임하현 도목촌(桃木村: 안동댐 수몰 전 월곡면, 현재 예안면 소속)에 터를 잡은 후 대대로 420여 년을 살았다.
도목촌에 있던 종택은 수려한 산세와 굽이돌아 흐르는 낙동강이 만들어낸 비경과 더불어 위용과 풍광이 빼어났다.
『임연재집』에는 도목촌의 아름다움을 시로 읊은 도촌팔영이 전한다.
 
桃村八詠
[桃木村]
桃源本在武陵中 도원은 본래 무릉땅에 있는데
千古風烟祕不通 오랜 세월 그 풍경 드러나지 않았네.
說與人間神境界 사람들에게 신비한 곳 말해버린
生憎當日捕魚翁 그 날 고기 잡던 늙은이 미워진다네.

[山水亭]
有水無山惟知樂 물 있고 산 없으면 지자만 즐거워하고
有山無水亦仁偏 산 있고 물 없으면 어진 데로만 치우치겠지.
主人占勝兼山水 주인이 산과 물을 겸한 뛰어난 곳에 자리 잡았으니
動靜何憂落一邊 동과 정의 기울기를 어찌 걱정하리요?

[臨淵觀魚]
臺下羣漁自在游 임연대 아래 고기들은 마음대로 헤엄치며
揚鱗縱鬣不知休 비늘과 지느러미 쉴 새 없이 움직이네.
仍思至理盈天地 이러한 지극한 이치 온 천지에 가득함을 생각하니
幷與鳶飛上下流 솔개가 하늘에서 나는 것과 함께 위와 아래에 흐르네.

[玄沙訪眞]
石逕苔斑花木深 좁은 돌길에 이끼 끼고 꽃나무 우거졌는데
烟中隱隱暮鍾音 안개 속 은은한 저녁 종소리
芒鞋竹杖獨歸去 대지팡이에 미투리 신고 혼자서 돌아가니
採藥仙翁何處尋 약을 캐는 신선은 어디서 찾나?

[春]
誰把紅桃夾岸栽 누가 복숭아꽃을 물가에 심었나?
枝枝輝映碧波開 가지마다 붉은 빛, 푸른 물결 속에 비치네
東風且莫輕吹擺 봄바람은 불어 꽃잎 날리지 말지어다.
怕有漁郞覓路來 고기 잡던 사내가 길 찾아올까 두려우니.

[夏]
落盡羣花春又歸 꽃은 다 떨어지고 봄도 돌아갔는데
南原綠草正芳菲 남쪽 들 푸른 풀이 향기롭구나.
天敎躑躅生新色 조물주가 철쭉꽃 빛 새롭게 하니
白白紅紅映翠微 하얀 빛 붉은 빛 산에서 비치네

[秋]
陣陣西風入夜窓 서풍이 계속해서 밤 창으로 들어오는데
叫霜新鴈下澄江 서리 속에 울던 기러기 맑은 강에 내리네.
一輪山月明如晝 산 위에 뜬 둥근달 대낮처럼 밝아서
黃菊叢邊擁酒缸 국화 무더기 곁에서 술항아리 끌어안았네.

[冬]
天地巖凝雪片零 세상 얼어붙은 바위 위에 눈이 날리니
四山環匝玉爲屛 모든 산 빙 둘러 옥 병풍 되었네.
寒江釣罷歸來好 겨울 강 낚시 거두고 돌아가는 것 좋아라,
月下柴扉也不扃 달빛 아래 사립문 빗장 걸지 않았으리.

현재의 종택은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3년에 지금의 송천동으로 이건한 것이다. 종택은 남서쪽으로 멀리 우뚝 솟은 갈라산 문필봉을 조산(朝山)으로 바라보고 있어 다른 산이 앞을 가리지 않으며, 청룡등과 백호등이 좌우측에서 겹겹이 감싸고 있다. 또한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이 동쪽에서 들어와서 서쪽의 선어대를 휘감아 돌아 나가고 있으니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건축물로서 흥해배씨종택
 
  • [도목시절 종택전경]

  • [도목시절 종택전경]

  • [종택전경]

 

이 집은 증병조참판 배천석(裵天錫,1511~1573)과 그의 아들 임연재(臨淵齋) 배삼익(裵三益,1534~1588,자:汝友)이 1558년에 건립한 것이다. 흥해배씨 안동 입향조인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1351~1413)의 종통(宗統)을 잇고 있는 백죽고택(栢竹古宅)이며, 퇴계의 제자이자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배삼익을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고 있는 임연재종택이다. 당호(堂號)는 금역당(琴易堂)인데, 이는 임연재의 아들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도사를 지낸 배용길(裵龍吉,1556~1609,자:明瑞)의 호를 딴 것이다.
배상지는 옛 왕조에 대한 절의의 표상으로 집 주변에 겨울이 되어도 색이 변하지 않는 잣나무(측백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호를‘백죽당’으로 하였으며, 시경詩經에‘전전긍긍戰戰兢兢 여임심연如臨深淵 여리박빙如履薄氷’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조심하고 삼가 하기를 마치 깊은 연못에 임한 듯이 하며 마치 얇은 얼음을 밟은 듯이 하라’라는 뜻이다. 배삼익은 도목 낙동강변 검암위에 임연대를 쌓아놓고 시경의 구절처럼 마음을 다잡는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호를‘임연재’이라 하였고, 배용길은 거문고(琴)와 주역(易)에 정진함을 삶의 목표로 정하고 이를 다짐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호를 ‘금역당’이라 하였다.

 

[백죽고택 편액]

 
  • [임연재 편액, 퇴계의 친필]

  • [도목촌 편액, 퇴계의 친필]

  • [금역당 편액]

 

건립 당시에는 54칸의 누운‘日’형태로 규모가 큰 가옥이었으나, 그 후 현재와 같은 구조로 변형되었다. 본래 안동시 월곡면 도목리(桃木里)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3년에 지금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현재의 종택은 안채와 대청,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상단의 5량가 팔작지붕의 몸채, 중층구조의 동서익랑, 행랑으로 구성되어 전체 평면이 ‘□’자 형이다. 대청채는 별동의 정면 4칸, 측면 2칸의 5량가 팔작지붕의 건물인데, 서측 4칸은 대청이며, 동측 3칸은 온돌방이고 1칸은 판방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인데, 남측 3칸은 노출된 당(堂)의 형태이고 북측 3칸은 감실이 위치한 판방의 구조이며, 건물의 좌우에는 풍판을 달았다. 이 종택에는 영쌍창, 연귀맞춤 창호, 안채 익랑과 행랑 상부의 붙박이창(독립창호), 체감률이 큰 민흘림기둥, 곡선으로 조각된 초공, 주먹장 이음을 일렬로 배치한 단연과 장연(이건과정에서 주먹장 이음을 해체하고 엇갈리게 배치), 사당의 후면 및 안채 일부의 각연 등이 잘 남아 있어 조선전기 반가건축의 특징을 다수 간직하고 있다.
임연재종택은 특히 창호가 아름다운 고택이다. 쉽게 접하지 못하는 오래된 양식의 창호들이 많다. 대표적인 조선전기 건축양식으로 인정되는, 양쪽의 문을 여닫을 수 있도록 중앙의 문설주를 넣어 만든 커다란 창호인 영쌍창, 인방과 기둥에 의지하지 않고 벽에 액자처럼 걸려있는 독립창호가 남아 있다. 또한 대부분의 창호가 네 귀퉁이를 대각선으로 연결한 연귀맞춤방식으로 제작되어 있다.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던 1812년 간행『상례비요(喪禮備要)』책자의 뒷면 안쪽에는 「금역당구가도(琴易堂舊家圖)」라는 이름으로 옛 종택 평면도가 전해온다. 이는 현재의 형태로 개축되기 전의 종택의 구성과 특징을 잘 말해준다.

 
  • [금역당구가도]

  • [금역당구가도의 공간배치(붉은색 테두리 안이 현존하는 종택)]

고려말에 우리나라에 유입된 주자학은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발전을 거듭하여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학문적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성리학은 당시 사회생활 전반을 지배하고 있던 이념이었다. 집을 짓는데도 이러한 성리학적 이념이 바탕에 깔려 있었고 공간구조 또한 그에 맞게 설정되었다. 즉, 가옥은 주자가례朱子家禮를 현실에서 실천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임연재종택 또한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따라 건립된 집이다.『가례』는 크게 관례(冠禮), 혼례(婚禮), 상례(喪禮), 제례(祭禮)로 나누어진다. 가례와 관련된 공간의 이용은 다음과 같다. 청사(廳舍)에서는 통례(通禮, 큰제사를 지낼 때는 사당에서 출주하여 청사에서 지냄)와 혼례(주인이 문 밖에서 신랑을 맞이하여 읍하고 사양하며 들어감)를 치렀다. 외청(外廳)에서는 관례, 혼례(주인이 빈객을 접대함) 및 상례(호상이 나아가 빈객을 맞이하여 청사에 이르러 곡한 후 다시 외청에 이르러 접대함) 등이 이루어졌다. 정침(正寢)에서는 상례(질병이 있으면 정침으로 이거함)와 제례(큰제사 이하의 제사를 지냄)가 행해졌다. 중당(中堂)에서는 계례(여자의 성년식) 및 혼례(여자 손님의 접대) 등이 이루어졌다. 현재에도 불천위제사는 대청에서 지내고 불천위 이하의 제사는 중당에서 지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장서지가 흥해배씨종택
 

임연재 배삼익은 생존 당시에 장서가(藏書家)로 알려져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과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집 등에도 실려 있다.

1609년 선조실록을 편찬하려던 실록청은 임진왜란 이전 사초(史草)가 불타버려 자료를 구하는데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에 실록청 총재관이던 이항복은 광해군에게 사대부의 가장일기와 문집이라도 대대적으로 찾아야 한다고 주청했으며, 그는 또“고(故) 감사 배삼익과 이개, 이수준의 집에도 병란 이전의 조보(朝報, 오늘날의 관보)가 보관되어 있으니 가져와야 한다”고 했다. 그 당시에도 종택에 많은 문서와 서적이 보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한강 정구는 40세 연하인 배숙전(임연재의 손자)에게 책을 빌려달라고 청하는 편지를 쓴 바 있다. 그 편지 글의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탁하고픈 말이 있네. 내가 일찍이 《경세기년(經世記年)》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는데, 이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의 일부를 참작하여 취한 것이었네. 이 책이 불타 버린 뒤에 아직 다시 편수하지 못한 것을 고민해 오다가 요즘 병중에 잠깐 손질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황극경세서》도 이미 불에 탔고 이곳 부근에는 또 빌릴 만한 곳이 없네. 생각해 보니 그대의 서고(書庫)에는 필시 그 책이 있지 않을까 하네. 바라건대 나에게 빌려 주어 이내 호사가가 책을 완성함으로써 동지들이 참고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 책이 소략하기는 하나 역대의 크고 작은 사건이며 나라의 흥망에 관한 내용이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으니, 유가(儒家)에게 있어서 무익하지는 않을 듯하네. 부디 이 점을 헤아리고 살펴 전질을 빌려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내 집을 한 집처럼 간주하여 무슨 책이든 다 빌려 주는 그대가 아니면 어찌 이런 부탁을 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종택에는 수 천여 점의 희귀한 고문서와 고서적이 보관되어 왔으나 격동의 세월을 거치면서 석연치 않은 여러 가지 사건들로 인해 외부로 반출되었으며, 반출된 희귀 고서적 중 일부는 대학 및 박물관 등에 분산 소장되고 있다. 1930년대에는 종택에 비장되어 온 [제왕운기(帝王韻紀)]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공개되었다. 현재에도 아래의 장서인이 찍힌 책들이 고서적상이나 골동품상 등을 통해 유통되고 있다고 하니 장서의 규모 조차도 파악조차 못하고 있다.

다음은 종택에서 사용했던 여러 가지 장서인(藏書印)이다. 이는 구자훈의 고려대학교박사학위논문「조선조의 장서인·장서가 연구」를 통해 확인되었다.

 
 

 
절의(節義), 애민(愛民) 그리고 위국(爲國)의 가문 흥해배씨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의 고려조를 향한 절의(節義)
 

[백죽당의 묘전비]

백죽당 배상지는 고려말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키자 초연히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더 이상 출사하지 않고 고려조에 대한 충절을 지킨 고려 유신 72명을 뜻하는 세칭 [두문동72현]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영가지] <우거편>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배상지는 흥해 사람이다. 흥해군 전의 아들로 부의 서쪽 금계리에 우거하였다. 고려 말기에 음사로 판사복시사를 지냈으나 중서랑이 굴공(屈公)의 고사로 공을 뜰에 굴복시키려 하니 즉시 관모를 벗고 옷소매를 떨쳐서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숨었다. 끝내 벼슬에 나가려는 마음이 없었다. 백죽(栢竹)을 심고 그 가운데에 집을 지어 거처했으므로 호를 백죽당이라 했다. 시와 술로 스스로 늙어갔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끝내 지조를 더럽히지 않고 즉었다. 시집이 남아 있으나 천수(千首)가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뒤에 아들 환(桓)이 귀하게 되어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백죽당의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는 묘의 위치에서도 알 수 있다. 묘소는 고려태조와 견훤이 전투했던 병산전투지를 굽어보고 있는 와룡면 서지리 가수천에 있다. 백죽당은 죽어서도 고려의 유신임을 잊지 않은 것이다. 1414년에 세워진 묘전비는, 왕릉비를 제외하고는 현재 영남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망국유신이라는 처지에서 사적은 적지 않고 관직과 가족관계만 간결하게 적은 형태로 소박하다.

 
임연재(臨淵齋) 배삼익(裵三益)의 애민정신(愛民精神)
 

백죽당 배상지의 7대 주손인 임연재 배삼익은 1587년 10월에 명나라 사행길을 마치고 귀국하였고, 곧 승정원 우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병이 있어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황해도 일대에서는 큰 흉년과 돌림병이 돌았고, 이에 조정에서는 임연재에게 황해도 백성을 구휼하고 다스릴 적임자로 라고 하여 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임연재는 병이 있는데도 ‘적임자’로 추천되고 임명되었다는 이유로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병이 있어서 우승지의 직책은 받아들이지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황해도관찰사 직책은 받아들였다. 임금의 명은 거스를 수 있었지만 백성들의 아픔과 아우성을 모른 척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때 주위에서는 임연재의 건강을 염려해 사임하고 휴식할 것을 권했으나, 임연재는 “나라에 바친 이 몸이 기민(饑民)을 구제하라는 명을 받고서 신하의 의(義)로 감히 병이 있다고 해서 사양할 수 있겠느냐”고 말한 뒤 병든 몸을 수레에 의탁하고 임지로 떠났다. 그리고 심혈을 기울여 빈사상태에 놓인 주민들을 소생시켰다. 과로로 인해 임연재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이에 좌우에서 휴양할 것을 권하면 “민생의 고통이 이와 같은데 기식(氣息)이 붙어있는 동안 어찌 스스로 안일을 구하겠는가”라며 건강을 돌보지 않고 백성들을 구휼하고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임연재가 남긴 공무일기(公務日記)인 황해도일기(黃海道日記)에는 운명하기 보름 전 즈음부터‘부좌(不坐)’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어나 앉을 수 없다는 뜻이다. 병이 깊어지자 여러 번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결국 일어나 앉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자 사직의 청이 받아들여졌다. 해주감영을 떠난 지 일주일 만에 청단역에 도착했고, 도착해서 수레에서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 운명했다.

 
 

임연재는 관직생활 중 대부분을 외직에서 보내며 백성들과 함께 했다. 지방에 오래 머물면 중앙정치에서 멀어지고 출세가 늦어진다는 인식으로 인해 지방관이 임기를 채우는 일은 극히 드물었음에도, 풍기군수 시절 주어진 임기 60개월을 다 채우는 등 42세부터 50세까지 8년간을 목민관으로 재직했다. 조정의 내직으로 벼슬이 내려져도 늘 신병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고 백성들과 가까운 곳에 있기를 원했다. 공은 관리로서 국가와 백성을 돌보는 것이 자신을 돌보는 것보다 항상 먼저였다.

후대의 사람들은 외교적 공을 세우고도 공신에 들지 못한 임연재를 두고 불우한 사람이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후손의 입장에서도 큰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비록 공신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였지만 공功을 세운 것은 분명하니 당당하고, 또한 병마와 싸우면서도 목민관으로서 백성들과 아픔을 함께하다 순직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공신이라 인정할 것이다.

 
임란의병 금역당(琴易堂) 배용길(裵龍吉)과 의사공(義士公) 배인길(裵寅吉), 그리고 독립운동
 

금역당 배용길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 1557~1617), 운천(雲川) 김용(金涌, 1557~1620) 등과 함께 이른바‘안동열읍향병(安東列邑鄕兵)’을 결성하여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안동열읍향병은 안동·예안·의성·의흥·군위의 인사가 안동 일직(一直)에서 회맹을 하여 결성된 의병조직으로 왜적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저항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팔조소(八條疏)」를 올렸는데, 일본과 화친을 맺지 말고 적을 소탕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며, 현 시국에 대해서8조목으로 상소한 것이다. 사후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한 공로가 인정되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었다.
의사공(義士公) 배인길(裵寅吉, 1571-1592)은 1592년 임진왜란에 종형 용길(龍吉)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예안현감 신지제(申之悌)의 관군과 합세하여 용궁으로 진군하여 분전하다가 22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의사공의 충의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의 전사소식을 듣고 자결한 배위 열녀 월성이씨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린 정려문이 봉화 유록에 있다.
일제치하에서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 여럿이다. 1919년 중국 남만주에 조직된 한족회에서 이주동포의 정착과 청년교육에 힘썼던 배영진(裵永進, 1864-1919), 1919년 임동면 편항(채거리) 장날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배태근(裵太根, 1871-1923)과 배혁모(裵赫模, 1875-1960),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경북에 들어와서 독립군 요원을 모집했던 배승환(裵昇煥, 1885-1951), 1906년 23세의 나이로 신돌석 의병에 참가하여 활동하다 체포된 배선한(裵善翰, 1886-1961), 1925년 화성회에 가담하여 활동한 배한수(裵漢守, 1902-1935), 고등학교 재학중 상록회에 가입하여 활동한 배근석(裵根錫, 1919-1979),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하는 한편 고향에 오산학교를 설립했던 배동환(裵東煥, 1898-1984) 등 수많은 인물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흥해배씨의자식교육
 

흥해배문의 자식교육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주는 야화와 편지글이 전하고 있다. 너그러우면서도 때로는 엄격하게 훈육하였으며, 어떤 곳에서 공부를 해야 하며,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자상하게 일러주기도 하였다. 정치에 함부로 관여하지 말 것과 모든 일에 삼가고 조심하라는 어버이의 마음은 현대의 어버이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배상지는 자식들을 교육하는 데 과정을 엄정하게 세워 차질이 없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너그러웠다고 한다.
둘째, 셋째, 넷째 아들을 죽림사(竹林寺)라는 절에 공부하러 보냈는데 아무 기별이 없어 글을 잘 읽고 있는지 궁금해서 연통 없이 찾아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마침 아버지가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하고 오랜 공부에 지쳐 회포를 풀 겸 해서 기생 셋을 불러다가 놀고 있었다. 불시에 아버지가 찾아오니 어쩔 줄을 몰라 당황하다가 방 한구석에 기생들을 이불에 싸서 밀쳐놓고 아버지를 맞이했다. 이를 본 배상지는 꾸중 한마디 없이 잠시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가면서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벽에 써 놓았다고 한다.

一裵一裵復一裵(일배일배부일배) 배씨 하나 배씨 하나 또 배씨 하나
三裵會處春風廻(삼배회처춘풍회) 배씨 셋 모인 곳에 봄바람 도는 구나
名是竹林非但竹(명시죽림비단죽) 절 이름은 죽림이나 대나무숲만은 아니로세
竹林深處桃花開(죽림심처도화개) 대나무숲 깊은 곳에 복숭아꽃도 피었다네

시를 지어 우회적으로 자식들을 깨우치게 한 것으로, 백죽당의 넓은 도량과 온화한 훈육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세 명의 아들들은 이런 아버지의 넓은 마음을 알고 더욱 더 공부에 정진하여 후 일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배삼익이 아들 배용길에게 보낸 편지
 
용길아 보거라!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 이곳도 별일 없다. 너는 그간 [중용中庸]을 다 읽었느냐?
다 읽었다면 [고문진보전집古文珍寶全集]을 보려무나.
부지런히 읽어서 아비의 원대한 바람에 부응하기 바란다.
이만 줄인다.
8월23일 아비가.
 
배용길이 아들 배숙전에게 보낸 편지
 
자고 먹는 일은 어떠하냐? 즉시 도산(陶山도산서원)으로 가서 머무르고 있느냐?
너의 게으른 성격은 언제나 고쳐질지,
아비는 걸핏하면 근심스럽고 개탄되어 밥 먹고 쉬는 사이에도 잊은 적이 없다.
[시전詩傳]은 모름지기 몇 번이고 반복해 외워야 하니, 멈추지 않고 읊조리는 사이에 저절로 힘을 얻을 것이다.
네가 만약 [문선文選]을 읽을 때처럼 배운다면 너 또한 읽기가 좋을 것이다.
5월27일 기제에는 너도 참석하여 마땅히 정성과 공경을 다해야 할 것이다.
 
배용길이 아들 배숙전에게 보낸 편지
 
봉솔奉率이 모두 편안하다는 편지를 받으니 위안됨을 알 만하구나
나는 한결같이 마음이 어수선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려 해도 할 수 없으니 답답하구나.
와전된 말에 몹시 놀랐다고 하니 모름지기 내 마음을 굳게 잡고 난 뒤에야 비로소 마을 사람들을 진압하여 승복시킬 수 있다.
‘모든 일에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고 까닭 없이 드나들 필요가 없다’는 자양(紫陽, 주자)의 격훈이 있기에 너를 위해 외워보는구나.
오직 글공부에만 부지런히 마음 쏟을 것을 바랄 뿐이다. 네가 부지런히 공부하고 태만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그 기쁨이 또한 어떠하겠느냐.
 
배용길이 아들 배숙전과 배택전에게 보내는 편지
 
네 어머니의 부스럼 병이 나아간다니 위안이 된다.
모름지기 쉬지 않고 부지런히 글을 읽어서 네 아비의 지극한 바람을 저버리지 않겠다니 매우 좋구나.
양식을 싸가지고 청량산 등지를 선택하여 머무는 것도 역시 안 될 것은 없다. 어찌 꼭 서원이어야만 하겠느냐,
나라 정치의 득실이나 수령의 현부(賢否)는 절대로 입에 담지 말고 다만 옛사람의 글을 읽기만을 바란다. [시전詩傳] 및 [논어論語]는 인쇄하여 보낼 계획이니, 너희들은 아비의 뜻을 깊이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모든 서적은 종류대로 구분하고 표시해 두어서 가지런하게 항상 두는 곳이 있어야 할 것이다.
 

 
흥해배씨의 주요인물
 

흥해배씨는 백죽당 배상지가 낙남(落南)한 이후 유구한 세월에 비해서는 손세가 번창하지 못한 편이다. 다음은 흥해배씨 주요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이다.

 
배상지(裵尙志,1351-1413)
 

고려 조정에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정3품)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될 무렵 벼슬을 버리고 안동 금계리에 들어와 잣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그 가운데 집을 지어 백죽당(栢竹堂)이라 편액하고 이를 호로 삼았다. 고려말기에 판삼사사를 지낸 정평공(靖平公) 손홍량 (孫洪亮, 1287~1379)의 외손으로, 형제들인 배상도(裵尙度)·배상경(裵尙絅)·배상공(裵尙恭)과 함께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배웠다. 백죽당은 고려말 주자학 도입기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상촌(桑村) 김자수(金子粹, 1351~1413) 등과 함께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몇 명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1650년에 사림들이 경광정사(鏡光精舍)를 짓고 사당을 세워 제향되었고, 1690년에 다시 사림에서 상소하여 병조판서를 증직받았으며 경광정사는 경광서원(鏡光書院)으로 승격되었다. 1414년에 세워진 묘전비는 영남지방의 묘비 중에서 왕릉비를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4명의 아들 중 3명이 문과에 급제하였고, 손자들까지 합하면 총 6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당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흥해배씨와 당시 무과급제자를 많이 배출하였던 영양남씨를 일컬어‘배문남무(裵文南武)’라 하였다. 「백죽당실기(栢竹堂實紀)」가 전한다.

 

[백죽당이 병조판서에 증직된 교지]

[경광서원 향사]

 
배상공(裵尙恭, 생몰년 미상)
 

백죽당(栢竹堂)의 아우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제자로서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으며, 고려가 망하자 그 형 상지(尙志)와 함께 안동에 낙향하였다. 하회마을에 들어가 살았는데, 옛 동료인 공조전서 류종혜(柳從惠, 풍산류씨 하회 입향조)와 교분이 두터워 그가 전토(田土)를 절반이나 나눠주었으니, 사람들은 이 둘을‘하회이전서(河回二典書)’라 불렀다.

 
배권(裵權, 1376~1427)
 
백죽당(栢竹堂)의 장남으로 1420년(세종 2) 음보(蔭補)로 벼슬길로 나아가서 사헌부감찰, 횡성·봉화현감·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배환(裵桓, 1379~1448)
 

[낙암정]

백죽당(栢竹堂)의 차남으로 금계리에서 태어났으며, 조용(趙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401년(태종 1)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직제학, 좌우사간 등을 거쳐 병·형·공조참의, 황해도·전라도·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선위사를 겸직하여 광주(廣州)에서 일본사신을 접견하였고 판진주목사를 지내다가 연로하여 물러났다.저술은 거의 유실되어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백죽당선생실기부사체사적(栢竹堂先生實記附四棣史蹟)』에 「침벽루차운(枕碧樓次韻))」이라는 시가 한 수 전해진다. 또 『월성지(月城誌)』에도 “유수일천년고국/ 한연사십팔왕릉/ 첨성대고기아집/ 반월성공야녹등(流水一千年故國 寒煙四十八王陵 瞻星臺古飢鴉集 半月城空野鹿登)”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1451년에 남후면 단호리의 절벽위에 낙암정(洛巖亭)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낙암정은 이후 허물어졌으며, 공의 7대손 배득인이 다시 지었으나 이 마저도 허물어졌다. 현재의 낙암정은 1813년에 중건한 것이며, 이후 여려번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94호로 지정되었다.
 
배남(裵楠, 1384~몰년 미상)
 
백죽당(栢竹堂)의 삼남으로 1411년(태종 11)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 사헌부감찰, 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배강(裵杠, 생몰년 미상)
 
백죽당(栢竹堂)의 사남으로 중형(仲兄) 환(桓)과 함께 정몽주 문인인 죽계(竹溪) 조용(趙庸)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426년(세종 8)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조정랑을 지냈으며 직언(直言)·간쟁(諫諍)으로 시폐(時弊)를 바로잡았던 일 등이「세종실록」,「국조인물고」 등에 전한다.
 
배소(裵素, 생몰년 미상)
 

상공(尙恭)의 아들로, 1408년(태종 8)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의성현령(義城縣令)을 지냈다.

 
배효숭(裵孝崇, 생몰년 미상)
 

관찰사공(觀察使公) 배환(裵桓)의 아들로 호는 조곡(糟谷)이며, 1447년(세종 29)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집의․여흥부사를 지냈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권되었다.

 
배효건(裵孝謇, 생몰년 미상)
 
관찰사공(觀察使公) 배환(裵桓)의 아들이자 효숭의 아우로 옥과현감, 남원진관병마절제도위 등을 지냈다. 만년에 이증(李增), 남치공(南致恭), 권자겸(權自謙) 등 고장의 덕망 있는 선비 13인과 우향계(友鄕稧)를 맺고 풍속교화에 이바지하였다.
 
배천석(裵天錫, 1511~1573)
 
백죽당(栢竹堂)의 6대 주손으로 1543년(중종 38)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천거로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에 임용된 이래 1546년(명종 1) 선교랑 충좌위부사과 병절교위에 임명되었으나 조모와 모후의 봉양을 위해 곧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558년(명종 13)에 내성 및 금계로부터 도목촌으로 옮겨 현 종택을 건립하였으며, 사후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묘갈명(墓碣銘)은 백담(柏潭) 구봉령(具鳳齡, 1526-1586)이 썼다.
 
배삼익(裵三益, 1534~1588)
 
백죽당(栢竹堂)의 7대 주손으로 자는 여우(汝友), 호는 임연재(臨淵齋)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이 되고, 156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밀양교수(密陽敎授)·성균관의 학유(學諭)·학록(學錄)·학정(學正)·박사 등을 거쳐 호조좌랑이 되었다.
1575년(선조 8)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형조정랑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외직인 풍기군수에 제수되자 부임하였으며, 풍기군수 재임기간 5년, 양양부사 3년 등 8년을 연속으로 목민관으로 제직하였다. 1583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과 1584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를 지낸 후 여러 관직을 거친 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헌납 겸 춘추관기주관(司憲府獻納兼春秋館記注官) 등을 역임하였다. 1585년에는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이래 상호군(上護軍)이 되었으며, 1587년 이조참판(吏曹參判) 직을 띄고 진사사(陳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직후 우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오랜 사행길에 얻은 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고 있는데, 당시 거듭된 흉년으로 황폐해진 황해도를 다스릴 적임자라고 하여 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임하였다. 부임후 관리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사력을 다해 주민 생활안정에 매진했으나, 과로로 인해 병이 더욱 깊어져 사직하고 내려오다 황해도 청단역에서 54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1565년부터 1567년까지 밀양교수로 있을 때 퇴계선생께 점필재서원 건립을 건의하고,「주자연보(朱子年譜)」를 고쳐서 간행하여 스승인 퇴계에게 올렸다. 1584년에 춘추관기주관으로 있을 때 큰 가뭄이 들자 「시무십조(時務十條)」 상소를 올렸고, 사간원 사간으로 옮겨서는 임금의 덕과 시사(時事)에 관한 「진십조(陳十條)」 상소를 올렸다. 1586년에 장예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부임해서는 1521년에 일어났던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억울하게 노비가 되고 멸족이 된 좌의정 안당(安瑭) 자손들의 오래된 한을 풀어주었다. 좌의정 안당을 무고했던 사람과 그 후손들은 권력과 부를 누리고 살았기 때문에, 역대 판결사들은 그들의 기세에 눌려 그전까진 안당 자손들이 낸 소송을 제대로 판결하지 못했으나 임연재가 나서서 비로소 정당하게 판결하자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황해도관찰사 시절에는 아들이 쇠고기가 원기를 돕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해와 올리니 물리치고 말하기를 “한 지방의 법을 집행하는 사람으로 있으면서 어찌 금하는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는가. 나를 불의의 함정에 빠뜨리지 말라”고 했다.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했으며, 관청의 재산을 사재보다 더 아꼈고, 부정한 청탁에는 응하지 않았다. 정해진 봉급 외에는 별다른 수입이 없어, 자신의 녹봉으로 부모를 봉양하는데 미치지 못하는 것을 항상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외직에 있을 때는 석채(釋菜 : 문묘에서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 석전제) 등의 제사를 지내는 일에 정성을 기울였다. 도산서원 초대 원장을 지냈으며, 장서가 및 서예가로도 널러 알려져 있다.
진사사로 명나라에 가서는 남다른 외교력을 발휘하였다. 조선 초기부터중국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가 간신 이인임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수많은 사신들이 노력했지만 제대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임연재는 왕실의 혈통 즉, 종계(宗系)를 바로 잡은 사실에 대하여, 명나라 예부(禮部)에 정식으로 요청하여「대명회전」 정정본 종계초본(宗系草本)을 받아왔다.
종계변무와 관련하여 명나라 사행시 서장관이었던 원사안을 비롯하여 많은 관리들이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올랐으나 임연재는 제외됐다. 사행시에 데려갔던 임연재의 하인이 대도(大盜) 이산(李山)과 내통하여 명나라 종묘의 보물인 옥환(玉環, 장신구의 일종)을 훔쳤던 일이 밝혀져서 이에 대한 책임으로 임연재는 별세 후인 1590년에 생전의 관직이 삭직되었다. 종계변무와 관련한 공신책록은 1591년에 있었고 당시 임연재는 삭직된 상태에 있었으므로 공신에도 들지 못하게 됐던 것이다. 그 후 후손(아들 금역당)의 신원소가 받아들여져 관작은 회복되었지만, 공신에 오르는 일은 후손이 대를 이어 억울함을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저서로 『임연재집(臨淵齋集)』, 『황해도일기黃海道日記』, 『조천록(朝天錄)』 등이 있다. 명나라에 진사사로 떠날 때 당대 명사들의 전별시인 조천별장(朝天別章)을 종가에서 첩으로 만들어서 보관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송암 권호문, 아계 이산해(영의정), 송당 유홍(좌의정), 졸옹 홍성민(이조판서), 파곡 이성중(호조판서), 사양 심충겸(병조판서), 호봉 송언신(이조판서), 동원 김귀영(좌의정), 남악 윤승길(좌참찬), 일휴당 금응협(익찬), 서간 이제민(좌참찬), 송당 황윤길(참판), 죽곡 이장영(부사), 매촌 이유(현감), 이정호(목사), 신암 이준민, 송간 황응규(돈녕부사), 청암 권동보(군수), 서경 류근(좌찬성), 모당 홍이상(부제학), 준봉 고종후(현령), 노저 이양원(영의정), 간재 이덕홍(현감), 이교, 식암 황섬(대사헌) 등의 친필 전별시가 담겨 있다.
불천위로 추존된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1665년경에 제작된 기일판(忌日板)에 4대조의 기일 앞에 5대조인 임연재의 기일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를 토대로 볼 때 임연재는 1665년 이전에 불천위에 추존된 것으로 확인된다. 봉화 유록에 있는 신도비명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묘갈명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지었다.
 

[봉화 유록에 있는 임연재의 신도비]

[임연재 문과급제 교지]

 

[임연재의 유묵]

[옥적]

[앵무배]

[상홀]

[임연재가 명나라 사행중 신종황제로부터받은 삼보]

 

[임연재가 처가(영양남씨)에서 상속받은 분재기]

 
배삼근(裵三近, 1536~1600)
 

 

[유산공, 의사공, 월성이씨가 제향되어 있는 추원사]

백죽당(栢竹堂)의 7대손으로 임연재의 아우이다. 자(字)는 여용(汝勇), 호(號)는 유산(儒山)이다.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학문이 고매(高邁)하였으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산림(山林)에 은거하였다. 만년에 추천을 받아 정릉참봉이 되었다. 묘소는 봉화 호애산(虎崖山) 백호등 외록(白虎嶝 外麓)에 있다. 후손들이 녹동(鹿洞)에 추원사(追遠祠)를 세워 향사를 지내왔다. 문적(門籍)이 별로 전하지 못하고, 시(詩) 한수가 남아있다. 계문제자록(溪門弟子錄)에는, 임연재 배삼익의 아우로 안동에 살았다고 나온다. 약관의 나이에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 학문이 고매하였으며, 유일재 김언기, 간재 이덕홍과 함께한 창화시(唱和詩)가 전한다. 배위(配位)는 진성이씨로 충순위 주(宙)의 따님이며, 조부는 찰방(察訪) 이징(李澄)이다. 이징(李澄)은 퇴계의 바로 위의 형이 되시니, 유산공은 스승인 퇴계의 종손서가 된다. 묘소는 녹동(鹿洞) 신림곡(新林谷)에 있다.
 
배용길(裵龍吉, 1556~1609)
 

 

[금역당 문과급제 교지]

백죽당(栢竹堂)의 8대 주손이며, 임연재의 아들이다. 자는 명서(明瑞), 호는 금역당(琴易堂) 또는 장육당(藏六堂)이다.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신신(藎臣)의 딸이며, 배위는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 1512~1584)의 손녀이다. 1585년(선조18)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해(金垓), 류복기(柳復起), 김용(金涌) 등과 함께 이른바‘안동열읍향병(安東列邑鄕兵)’을 결성하여 김해(金垓)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안동열읍향병은 안동·예안·의성·의흥·군위의 인사가 안동 일직(一直)에서 회맹을 하여 결성된 의병조직으로 왜적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저항하였다. 1594년 세마(洗馬)의 직을 받고 이어 시직(侍直)·부솔(副率)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팔조소(八條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에서 금역당은 현 시국에 대한 비판 및 육상방어전략의 변경, 그리고 일본과의 화친이 아니라 섬멸을 주장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160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이듬해에는 예문관 검열과 대교(待敎)를 거쳐 1606년에는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했다. 1607년에는 충청도도사를 지냈고, 1608년에는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김성일(金誠一)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어 류성룡(柳成龍)·조목(趙穆)·남치리(南致利) 등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들을 스승으로 섬기고 공부했다. 천문·지리·율력(律曆)·병전(兵典)·의약 등 다방면에 대해 깊이 공부하였고,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사후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한 공로가 인정되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승정원(承政院)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금역당집(琴易堂集)』이 있다. 묘갈명은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가, 행장은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1777-1861)이 썼다.
 
 
 
배득인(裵得仁, 1566~1623)
 
관찰사공(觀察使公) 배환(裵桓)의 7대손으로 자는 영중(榮仲), 호는 낙암(洛巖)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권기(權紀) 등과 함께 안동의 인문지리지「영가지(永嘉誌)」를 편찬하였다.
 
배인길(裵寅吉, 1571~1592)
 

 

[정여문(쌍절여)]

유산공(儒山公) 배삼근(裵三近)의 아들이자 임연재(臨淵齋)의 생질이며, 자는 경보(敬甫)이다. 1592년 임진왜란에 종형 용길(龍吉)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예안현감 신지제(申之悌)의 관군과 합세하여 용궁으로 진군하여 분전하다가 22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의사공의 충의정신과 그의 전사소식을 듣고 자결한 배위 열녀 월성이씨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린 정려문이 봉화 유록에 있다.
 
배윤전(裵潤全, 1604~1660)
 

자(字)는 덕언(德彦), 호(號)는 도장(道藏)으로 금역당(琴易堂)의 아들이다. 겨우 6세 때 부친이 돌아가시니 맏형 숙전(淑全)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하여 문장이 세상에 알려졌다. 일찍이 백졸암(百拙庵) 류직(柳㮨),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 야암(野庵) 김임(金恁)과 함께 도의(道義)로 주고받은 서찰과 시가 많았다. 천문(天門), 지리(地理), 복서(卜筮) 등의 서적에 통달했는데, 그 중 특히 담명(談命), 복서(卜筮)는 그 당시 덕행(德行)과 명망(名望)이 높은 분들이 모두 그에게 물었다. 말년에 백졸암(百拙庵), 표은(瓢隱), 야암(野庵)과 함께 계원4로(溪院四老:호계서원의 네 노인)로 불리워졌다. 승지(承旨) 남연이 말하기를 “배모의 담명복서는 일일이 안맞는 게 없어서 마치 신령의 감응이 있는 듯 진실로 경복(敬服)할 만하다.”하고 하였다. 하루는 점괘를 풀어보니 가노(家奴)가 그날 밤에 도망(逃亡)을 갈 것인지라 다른 종을 시켜서 달아날 길목을 지키다가 붙들어 오라고 보냈더니 과연 그 길로 도망해 오는지라 지키던 종이 내달아 “네가 아무도 모르게 도망쳐도 벌써 아시고 나를 여기서 지키다가 데려오라 하시기에 내가 와서 기다리니 어디를 가도 다 아실 것이니 집으로 가자.”하고 데려왔다. 공의 아들이 나이가 장성했는데 장가를 보내지 아니하므로 다른 사람이 모두 왜 장가를 보내지 않느냐고 하였다. 공은 태연히 장가를 보내면 곧 죽을 것이라. 그래 더 사는 것이 나을 듯해서라고 하더니 29세에 부득이 성혼을 시켰더니 그해 가을에 객사를 했다. 그래서 공의 손자 섬(暹)이 유복자이다. 그때 어느 정승이 조정에 천거를 할 터이니 서울로 올라오라고 하였으나, 공은 “벼슬을 하고 임금님의 총애를 받는 것도 명수(命數)가 있는 것이니 어찌 잠시 윗사람을 속여서 벼슬을 하며 부귀영화를 탐내겠는가” 하며 끝내 응하지 아니하였다. 정승은 그의 확고한 뜻을 흔들 수 없다면서 탄복하였다.

 
배면(裵冕, 1651~1718)
 
금역당(琴易堂)의 증손으로 자는 봉경(奉卿), 호는 도와(綯窩)이다. 어려서는 백졸암(百拙庵) 류직(柳稷)과 금옹(錦翁) 김학배(金學培)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자라서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갈암의 학문을 이어 받아 과거제 개혁과 퇴계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동참하며 율곡 이이(李珥)의 학설에 반대하였다. 젊어서는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뜻을 두기도 하였으나, 세속의 영리(營利)에 마음을 두지 않고 꾸준히 학문과 독서를 통한 즐거움에 젖어 살았다. 사후에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도와집(綯窩集)이 전한다.
 
배행검(裵行儉, 1673~1752)
 
금역당(琴易堂)의 현손으로, 자는 수약(守約), 호는 삼여당(三餘堂)이다. 10여세 즈음에 남석기(南碩耆)에게서 배웠으며, 박학하여 소년 시절부터 이름이 났는데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은 삼여당의 박식에 대하여 당세에 더할 이가 없다고 칭찬하였다. 젊어서는 과거를 준비하였으나 40세 전에 그만두고 학문 탐구에 몰두하였다. 사서(四書)와 주자(朱子)의 글을 외웠고 사한(史翰)과 당송(唐宋) 대가들의 글은 물론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고(典故)도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선현들의 사적(史籍)을 밝히는 데도 힘을 기울여 김자수(金自粹), 우탁(禹倬), 손홍량(孫洪亮)의 사적을 상고하여 기존 역사서의 오류를 바로 잡았다. 또 이광정(李光靖), 권덕수(權德秀) 등과 도의문장(道義文章)을 강마하였으며 평생 후진을 길러 안동의 문풍 진작에 힘썼다. 호조참판으로 증직되었으며, 문집으로 6권 3책의「삼여당집(三餘堂集)」이 있다.
 
배상열(裵相說, 1759~1789)
 
유산공(儒山公) 배삼근(裵三近)의 후손으로 집(緝)의 아들이며, 자는 군필(君弼), 호는 괴담(槐潭)이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5~6세에 글을 읽고 썼으며, 11세에 스승을 찾아 공부할 때 지은 시를 보고 사람들이 신동이라고 하였다. 15세에 독학으로역학(易學), 산학(算學), 율려(律呂)와 천문(天文) 등을 공부하였다. 상수학(象數學)에 뛰어났고, 천문·지리·주수(籌數) 등에 정통하였으며, 일찍이 산천을 측량하고 일경대(日景臺)를 지어 천상(天象)을 관측하고 혼천의(渾天儀, 또는 선기옥형)를 만들었다. 22세에 이상정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에 뜻을 두고 경전과 사서(四書)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상정이 세상을 뜨자 그의 아우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에게도 배웠다.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으나 3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중요한 저서로는「괴담유고(槐潭遺稿)」가 있으며, 그밖에「도학육도(道學六圖)」「서계쇄록(書計瑣錄)「성리찬요(性理纂要)「사서찬요(四書纂要)「계몽도해(啓蒙圖解) 등이 있다. 1831년에 유림들의 발의에 의해 불천위로 추존되었다.
 

[괴담이 제작한 선기옥형]

[괴담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건립한 녹동이사]

 
배상협(裵相協:1766∼1809)
 
유산공(儒山公) 배삼근(裵三近)의 후손으로 호조참의에 증직된 손(孫)의 아들이며, 자(字)는 군섭(君燮), 호(號)는 송려(松廬), 족형인 상열(相說)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송려집(松廬集)이 전하는데 이 문집은 1920년 손자 동진(東進)과 선영(善榮)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詩)는 4수에 지나지 않으나 시의가 간결하고 속태에서 벗어나 이상을 추구하고 있다. 서(書)는 저자의 경학에 대한 깊은 연구를 보여 주고 있다. 「상괴담선생경의문목(上槐潭先生經義問目)」은 스승인 배상열에게 체용(體用)에서 용(用)의 미묘한 작용과 정(定), 정(靜), 안(安) 3자의 뜻, 3강령, 8조목의 본의에 대하여 질의한 것이다. 또한, 김양건(金養健), 배상규(裵相逵) 등과의 별지 문답에서는 용학을 위주로 해석하고 한원진(韓元震)의 설을 인용하여 자기의 견해가 옮음을 입증하였는데 당시 영남학자로서 한원진의 학설을 인용한 것은 드문 예라 할 수 있다. 「안택설(安宅說)」은 맹자의 설을 인용하여 인(仁)이 안택(安宅)이 되는 이유를 설명한 글인데 만물의 조화는 균형을 이루는데 있고 만물의 균형은 안정에 있다고 설명하면서 인(仁)은 생성하는 길이므로 인(仁)을 행하면 군신과 부도가 편안함을 얻고 인으로 다스리면 초목과 금수도 그 처할 곳을 얻어서 편안하게 되므로 인(仁)이 안택(安宅)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배선원(裵善源, 1808~1880)
 

임연재(臨淵齋)의 후손으로 자는 성함(性涵), 호는 수간(守磵)이다. 16세에는 서포(西圃) 권재성(權載成)의 문인이 되었는데, 후에 권재성의 사위가 될 정도로 인정을 받았으며 문하에서 기천(杞泉) 권승하(權承夏),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 등과 교유하였다. 26세 때 퇴계학맥의 중심을 이룬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특히 만산(萬山) 류치엄(柳致儼), 신암(愼庵) 이만각(李晩慤)과 긴밀하게 교유하였다. 48세 때 류치명이 호군으로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도리어 대사간 박내만(朴來萬)의 탄핵에 의해 지도(智島)에 유배되었을 때 모시고 같이 갔으며, 1861년(철종 12) 류치명이 작고했을 때에는 심상(心喪)을 하였다. 1871년(고종 8)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세도정권의 조정에서는 벼슬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다. 자신이 살던 고을 북쪽에 있는 골짜기에 집을 짓고 편액을 ‘수간(守磵)’이라 하고서 학문을 연마하며 여생을 보냈다. 자식들의 교육에 엄격하였는데 예컨대 「정훈차록(庭訓箚錄)」에서 자식들에게 “동무들과 함께 놀러 갔을 때 잡담을 하지 말고 서책에 관해 논하라.”라고 훈계하고 있다. 문집으로 『수간집(守磵集)』이 있으며, 저술로 『사칠변집증(四七辨輯證)』 2권이 전한다.

 
배상규(裵相奎, 1811~1890)
 
관찰사공(觀察使公) 배환(裵桓)의 후손으로 통정대부 행용양위부호군 성재(醒齋) 유진(維震)의 아들이며, 자는 치문(稚文)이고 호는 낙선당(樂善堂)이다. 순흥에 살았으며, 1843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 전적·사간원 정언·사헌부 감찰·성균 직강·이조 정랑·홍문관 직제학 등을 거쳐 1890년 가의대부 이조참판에 올랐다. 관직이 분명하고 문장이 출중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문집이 남아있지 않다.
 
배상현(裵象鉉, 1814~1884)
 
관찰사공(觀察使公) 배환(裵桓)의 후손으로 담(曇)의 아들이며 자는 이옥(耳玉), 호는 오산(浯山)이다. 184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84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 전적․사헌부 지평․이조 정랑․성균 직강․사간원 정언․황산도 찰방 등을 지냈다. 저서로「국창관록(菊窓盥錄)」,「동국십지(東國十志)」,「오산집(浯山集)」이 있다. 1855년에 저술한「동국십지」 3권 3책은 우리나라의 전장제도(典章制度)를 유형별로 나누어 편찬한 백과사전이다.
 
배영진(裵永進, 1864~1919)
 
금역당(琴易堂)의 9대손으로 자는 희안(希顔), 호는 백봉(白峰)이다. 경술국치 후 1912년 만주 동화현으로 건너가서, 1919년 남만주에서 한족회가 조직되자 이상룡(李相龍)·김대락(金大洛)·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이주 동포의 정착을 협의하고 황무지 개척과 청년교육에 힘썼다. 사후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배선한(裵善翰, 1886~1961)
 

관찰사공(觀察使公) 배환(裵桓)의 후손으로 용주(龍周)의 아들이며, 자는 백여(伯汝)이다. 1906년 23세의 나이로 신돌석 의병에 참가하여 같은 해 3월 50명의 의병들과 함께 영양읍을 공격하여 무기고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았다. 4월에는 130명의 병력으로 청송읍을 공격하였고, 1907년에는 부대를 재정비하여 진보·영양·평해·청송 일대에서 일군(日軍)과 싸우다가 1908년 6월에 체포되었다. 대구 지방재판소에서 15년의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사후 1977년에 건국 포장을 받았다.

 
배동환(裵東煥,1898~1984)
 
임연재(臨淵齋)의 후손으로 호는 백저(白渚)이며, 독립운동가이자 한학자이다. 1919년 음력 12월 차경석(車京錫)이 교주로 있는 흠치교 교단(敎團)에 가입하여 종교 활동을 표방하면서 나라를 되찾는 데 노력하는 한편, 경상북도 지역에서 흠치교 신도를 모집하여 교세를 확장하고자 하였다. 1924년 “갑자년(甲子年)이 되면 흠치교의 힘으로 조선이 독립할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자금 모집 및 포교에 힘을 쏟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1년 4월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9년 8월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43년경에는 고향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1940년에는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해방후 귀국하여 안동과 대구에서 저술과 교육 활동을 하였으며,「백저문집(白渚文集)」이 있다. 사후 200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